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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통신 8호] 노동자 건강 문제는 여전히 찬밥?! (임준,가천대)
 작성자(아이디) hpwebzine  작성자(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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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일 2010.03.08 10:30:16
 수정일 2010.03.08 10:3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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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통신]

[해외통신 8호]

노동자 건강 문제는 여전히 찬밥?!

 

임 준

가천대

 

 

2009년 11월,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국 공중보건학회를 다녀온 후 변화를 꼽으라면, 단연 메일 수신함에 전자메일이 늘어나고 있음을 꼽을 것이다. 학회 참가 전에는 대학 당국이 보내오는 소식지를 제외하면 하루 종일 한 통의 메일도 오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국에서 습관적으로 메일을 확인하곤 했던 버릇이 되살아날 정도로 심심찮게 메일이 오고 있다. 특히, 학회가 시작될 쯤에 개최되었던 ‘노동자 건강을 위한 전미 활동가 회의(이하 활동가 회의)’에 참가한 후부터 노동자 건강 문제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는 점이 눈에 띄는 변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정보의 공급이 없었다고 해도 ‘활동가 회의’는 나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먼저, 놀라웠던 것은 ‘활동가 회의’에서, 우리로 치면 지역산업안전보건단체쯤 되는 노동자 건강관련 단체의 활동가 뿐 아니라 노동조합 간부, 연구자, 정부 관계자에 이르기까지 노동자의 건강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회적 주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도 1997년에 그러한 경험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 대상이 노동조합과 지역산업안전보건단체의 활동가에 국한되어 있었고, 그것마저 갈등만 남긴 채 해산되었던 좋지 않은 기억을 갖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회의 분위기다! 그저 연례행사처럼 인사를 하는 자리로 생각을 했는데, 여러 분과로 나뉘어서 회의 내내 진솔한 논의를 이어갔고, 구체적인 계획을 도출하기 위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정부 측 관계자의 결합 자체도 이채로웠지만, 방관자가 아닌 주체로 참여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나타난 긍정적인 변화의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놀라움은 ‘활동가 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이어졌는데, 공중보건학회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학회장에서 개최된 ‘직업안전보건 시상식’에서 극대화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시상식의 전경은, 저 사람이 무엇을 잘 해서 상을 받는 것인지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이러저러한 성과가 발표되고 해당 수상자에게 시상을 하고 나면 수상자가 의례적 인사와 참석자의 형식적 박수로 끝을 맺는 연례행사의 모습이었다. 정말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축하와 열의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날 시상식은 달랐다. 특히, 브라질 석유산업에서 노동자 건강 문제를 최초로 제기하고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 투쟁을 전개하였던 브라질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 공로상이 수여되는 순간은 잊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회의장을 가득 메운 연구자, 활동가, 노동조합 간부, 정부 관계자들이 누구 가릴 것 없이 기꺼이 환호하고 기립 박수를 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전문가, 노동조합, 활동가, 그리고 정부까지 노동자 건강을 위협하는 자본에 맞서 연대 전선을 구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오랜 시간 노동자 건강권 운동의 문제로 등장했던 전문가와 활동가의 괴리 문제는 전혀 없는 듯 했다.

현명한 독자들이라면 다들 느꼈겠지만, 사실 이것은 나의 환상이었다. 학회를 다녀온 이후 안전보건 세션을 준비했던 한 연구자를 만난 자리에서 최소한 전문가 영역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안전보건의 주류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공중보건이 아니면 도대체 누가 주류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와 마찬가지로 미국도 산업의학, 산업위생, 산업안전 등 관련 전문가 모임이 전문가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사업주와 노동자의 중립 지대를 설정하면서 은밀히 또는 노골적으로 자본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것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우리만 하겠는가? 우리 전문가 중에는 근로자가 아닌 노동자라는 용어 사용 자체를 문제시 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최근 노동자의 관점에서 노동자 건강 문제를 바라보고자 노력하는 ‘소위’ 전문가가 아닌 ‘진정한’ 전문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내가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보건대학원에서 연수 자리를 찾아보지 않고 생소한 ‘지역경제 및 사회개발 학과’라는 정치학 및 경제학 기반의 학과에서 연수를 하게 된 것도 노동자 건강권 문제와 무관치 않다. 흔히들 전문가들이 접근하는 노동자 건강 문제는 유해 물질과 작업 환경에 대한 접근이 대부분이라 해도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최근 노동시간, 근무형태, 고용형태, 교육 및 알권리 등이 건강에 미치는 연구가 진행되고는 있지만,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더욱이 특정한 노동자 건강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정치사회적 맥락, 작업장의 권력 및 자원의 분배 구조 등에 대한 동학(dynamics)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실 그러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연구비 부담 주체의 문제도 걸리는 일이겠지만, 계량 연구에 지배당하고 있는 학문 지형 속에서 이러한 연구 결과를 실어줄 학회지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래서 더 건강정책학회의 자리가 더 무겁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건강 문제를 유발하는 유해 물질이나 작업 환경을 찾아나가고 개선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좀 더 구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이를 위해서는 유해 물질이 배출되고 작업 환경이 악화되는 생산 과정 및 그를 둘러싼 행위 주체에 대한 정치한 분석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이 부분에 대한 분석과 전략의 재구성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분야에 발을 담그고 새로운 접근 전략을 제시하고 있는 책자(At the point of production)의 번역을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연구를 포함한 노동자 건강 문제에서의 새로운 접근 전략의 필요성을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후 기대와 실망, 변화와 집착이 교차하는 현실에서 더 강하게 느끼고 있다. 부시 행정부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직업안전보건청의 수장이 교체되면서 그 위상과 역할이 강화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노동자 건강 문제는 행정부 내에서 예산 등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는 주제라는 사실이 최근 예산 편성에서 드러나고 있다.

단지 정권이 바뀌니까 변화할 것으로 기대했다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이러한 정치적 역관계의 부분적 변화가 노동자 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 그리고 어떠한 전략으로 이를 돌파할 것인지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랬을 때만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변화의 모멘텀을 더 적극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우파적 노동조합 운동을 극복하고 새로운 노동운동을 준비 또는 실천하고 있는 노동운동의 움직임과 이 속에서 과거보다 좀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서비스 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새로운 안전보건의 문제와 이슈들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분석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또한, 신자유주의의 부침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기업의 태도와 역할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지, 그리고 그들은 변화된 환경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될지를 풍부하게 분석하고 노동자 건강의 진전을 이루기 위한 사회적 전략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러한 접근이 가능하다면, 노동자 건강 문제의 해결 전망이 더 밝아질 수 있지 않을까? 당연하게도 기존의 방법론과 접근 방식으로는 이러한 변화가 갖는 함의를 도출하기 어렵고 실천적 전략을 내오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쯤 되면 ‘뭐 엄청난 걸 공부하고 오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공부의 양이 아니라 발상의 전환이 아닌가!

어찌되었건 오바마가 들어서도 노동자 건강 문제는 아직 찬밥을 면한 것 같지는 않다. 비정규 노동자나 이주 노동자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네트워킹이 활성화되고 변화된 정치사회적 지형을 적극 활용하고자 하는 노력이 커지는 등 조심스러운 변화의 조짐이 노동자건강권 운동을 포함하여 정부, 학계, 노동운동에서 감지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 또는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현실이 나와 한국에 있는 나의 동료들이 함께 고민하고 이론적 실천을 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